담담한 교사, 안전한 교사
김유미
한번 나쁘게 본 학생을 대할 때 교육만으로 지금 이 학생이 더 괜찮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을지 끝없이 의심했었다. 교육과 훈육의 과정은 이 아이에게 그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으며, 이 아이는 앞으로 어떤 일을 겪어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자라지는 않을 거라는 단정. 세상의 아무나가 이 일을 담은 기사를 본다면 분노에 차 내뱉을만한, 아이에게 그런 ‘처벌’만이 있기를 바라는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교사는 그런 ‘아무나’가 되면 안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교사를 관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 나를 바꾼 것은 아이들과 어떤 멋지고 커다란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서 전문가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나에게 그리고 나와 아이들과의 관계에 도움이 되는, 보다 합당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자존감도 회복되었다. 내게 부정적인 감정들이 밀려와도 아이들에게 쏟아내지 않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생각의 과정이 나를 담담하게 했다. 비로소 교사로서 만나는 아이들과의 하루하루가 소중해졌다.
▲ ‘우리 만난지...D-100’
나를 적처럼 대하는 학생
‘나를 정서적으로 가깝게 느끼는 걸까? 투정을 부려도 되는 안전한 대상으로 느끼는 걸까? 혹시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자신을 무시하길 바라면서 주목받을 행동을 자꾸만 하는 학생을 만날 때면 생각한다. 아이의 감춰진 부분은 아무도 모른다. 사랑으로 학생을 대하되 머리를 쓴다. 이 아이도 무의식적으로 주목받고 사랑을 받고 싶은 거라면 적대적인 태도에 주의를 주기보다는 정당한 행동을 하거나 나를 존경의 태도로 대할 때, 하나라도 괜찮은 행동일 때 주목하고 그걸 강화하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 나도 다면적인 존재인데 학생도 당연히 그렇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전부이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면 생각보다 쉽고 간단한 방법이다. 아이들이 그렇게까지 단순하지만은 않으니까. 특히 상처받은 아이라면.
교사로서 존중받고 싶은 욕구가 좌절되어 힘든 나
그래도 나를 적처럼 대하는데 내 마음이 어떻게 멀쩡할까. 선생님들은 어떻게 이 많은 순간을 현장에서 하나하나 감당하고 계시는 걸까. 나도 괜찮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상처만 받고 끝나는 것을 그만두었다. 학생과의 관계를 100에서 시작하지 않기로 했다. 상처를 감당하기보다는 발전적인 교사와 학생 관계를 갖는 것. 학생과의 관계를 100에서 깎아가는 게 아니라 1에서부터 쌓아가기로 했다. 학교에는 사실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학생이 있다. 한 명이라도 예쁜 학생이 예쁜 짓을 하면 이것을 긍정적인 일로, 나를 충족시키는 일로 하나씩 모은다. 그리고 교사는 이런 생각의 전환을, 노력을 해야만 하는 직업이라고 여기자 학교생활이 더 수월해졌다. 문학 작품에서나 보던 숙명처럼.
계속 나를 거부하는 학생
학생 입장에서 교사를 미워하거나 몇 번 적대적으로 대했는데 완전히 자기 입장을 바꾸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교육 심리학이 떠올랐다. 특히 인지적인 경직성이나 고집이 있는 아이라면 어떤 식의 변화를 수용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니까. 그럴 땐 “시간을 가져보자.”라고 담백하게 말했다. 학생의 특성에 따라 “나는 너랑 잘 지내고 싶어. 나는 기다릴 수 있어.”라고 말하고 기다리기도 했다. 나 자신의 회복력이 낮은 것을 깨닫자 학생들의 회복력이 낮은 경우를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태도 변화에 시간이 걸리는 학생을 보아도 밉지가 않다. 학생이 자율적으로 나에 대한 태도를 조금씩 변화시키도록 시간을 가졌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보다 어른이고 교사니까, 같은 상황에서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먼저 기다린다.
학생의 삶이 내게 주는 지나친 무게감
교사 생활 초반, 학생의 상황이나 마음이 지금 괜찮은지 신경 쓰고 변화를 잡아내는 민감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변화를 잘 잡아내는 점이 가끔 나를 피곤하게 했다. 아이가 흘린 작은 단서만으로 아이가 얼마나 힘들지 부정적인 추론을 진행했다. 내게 가장 무거운 일은 삶의 통제 불가능이었다. ‘내일 이 아이가 살아있을까?’ 무슨 일이 있다면 이것은 이 학생의 일인데 내 일처럼 신경을 쓰고 걱정하던 것이다. 공감력이 높은 특성은 좋은 교사의 자질이겠지만 담임으로서 학생 30명의 자극을 책임감을 느끼며 처리하는 것이 내게는 피로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돌아보니, 마치 구원이라도 하려는 듯한 마음가짐이었던 것 같다. 살아오며 주변 사람에게 느꼈던 무게감과 학생에게 느끼는 무게감은 달랐다. 거리를 두어야 할 때였다. 학생을 사랑하고, 인류애를 갖고, 공감력이 있는 것이 자기 불안으로 들어차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런 두려움을 내려놓고 아이의 감정은 아이의 것으로 중립적으로 지각하자 오히려 아이들이 잠시 기댈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었다.
학교에서 겪은 크고 작은 사건과 나의 감정
아무리 예상했던 사건이라도 사건을 겪는다면 당사자인 아이들에게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다른 선생님들과 이야기도 충분히 나누고, 나를 힘들게 한 아이가 있다면 그런 선택을 한 나름의 이유도 찾아보고, 함께 안타까워하는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 필요하다.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먼저 고민한 선생님들의 도움 속에서 나를 잘 살피고, 스트레스 많이 받지 않고 좀 더 편안해질 수 있다. 그 시간 속에서 ‘가장 중요하게 떠올랐던 나의 생각을 찾고 그 생각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스스로 차분히 보는 것.’ 이 마무리 과정을 거치면 다시 건강한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