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지 않고 사는 법
이민경(갈산고등학교 국어 교사)
추천 책: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유, 돌베개)
제가 소개할 책은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유)』입니다. 이 책을 읽고 이렇게 소개하고자 했던 이유를 2014년으로 돌아가 잠시 이야기해드리려 합니다.
2014년 충남의 한 고등학교로 신규 발령을 받았습니다. 열정 반, 두려움 반으로 시작한 특성화고에서의 첫 국어 수업은 눈물로 끝을 맺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하지 말자, 힘을 빼고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어 비교적 익숙하고 아이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으로 가벼운 시 수업을 했습니다. 기대 이상의 반응을 얻었고 저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태주 시인에게 무턱대고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메일에 답장이 왔고 눈이 펑펑 내리던 12월 겨울. 나태주 시인께서 직접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굽이굽이 타 시군의 면 단위 시골 학교까지 오셨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눈길을 뚫고 와주셨다는 것에 감사했고 아이들에게 작품을 지은 사람을 만나보는 의미 있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히터를 켰으나 강당은 너무나 추웠고 열악한 환경이지만 멀리서 아이들을 위해 와주신 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강의 중간에 쉬실 때 좀 편안한 의자에 앉으시라고 교무실에서 손님 접대용 의자를 옮겨가는데
“저딴 사람이 뭔데 저렇게 지극정성이야 쟤는, 신규라서 그런가 뭘 모르나.”
제 귀에 이런 말이 들려왔습니다. 우선 어른에게 저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납득이 가지 않았고, 선배 교사라는 분이 후배에게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맞나 싶었습니다. 제 노력이 한순간에 짓밟힘 당하는 것 같은 모멸감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저는 그냥 초짜, 1년 차 신규교사였으니까요. 이 일이 8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폭력적 경험이 저에게 각인됐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2014년의 제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동안 뉴스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지나갔던 특성화고 현장 실습생들의 이야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고, 책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부당하게 스러져간 청소년들과 그들을 지키려 한 사람들의 삶을 조심스럽고도 진실하게 다루어낸 이 책을 온 맘을 다해 단숨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이것이 한 사람의 일, 한순간의 일이 아님을 느끼고 심화국어 시간을 통해 노동ㆍ인권 주제의 수업을 기획했습니다. ‘과연 아이들이 책을 읽을까?’라는 의심이 무색할 만큼 평소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던 학생도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집중해서 읽었고, 함께 욕하고 분노하고 공감했습니다. 많은 것을 하지 않았는데도 아이들과 이미 한 마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책이라 좋았습니다. 8차시 동안 메모하며 책을 읽은 뒤, 15차시 정도 자유롭게 생각을 공유하고, 사회비평문을 쓰고 피드백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활동을 정리하며 짧은 영화를 한 편 본 뒤 스무 살을 코앞에 둔 고3이라는 현실에 맞게 각자가 희망하는 진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겪는 부당한 상황 개선을 건의하는 말하기 활동 약 20차시를 끝으로 수업을 마무리했습니다. 물 흐르듯이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서툰 과정에서 아이들도 저도 노동, 인권, 우리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신규교사 때 ‘난 언제 3년 차가 되나, 5년 차가 되나, 언제쯤 여유를 가지게 되나.’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느새 9년 차 교사가 되었는데도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 없이 살아왔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고 수업을 꾸려나가는 동안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국어 교과를 통해 아이들에게 키워주고 싶은 것은 첫해 때부터 다짐해 온 '살아가는 힘'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저는 학생들에게 “힘들어서 어쩌니…… 그래도 버텨야 살아. 지금 버티지 못하면 나중에 네 앞에 무슨 일이 닥쳐도 못 버틸 거야.”라는 말을 쉽게 뱉었고, 주어진 환경에 순응해 살아가는 법을 가르쳤지, 그 환경과 상황을 둘러보고 문제의식을 느끼고 스스로 대응하며 살아가는 힘을 길러주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이런 수업을 한다고 해서 갑자기 교실에 앉아있던 애들이 문을 박차고 나가 세상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피켓을 들고 시위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평상시에 한두 마디 해주는 게 중요해요.” 라고 말한 책 속의 장윤호 선생님의 말처럼 그저 가랑비에 옷 젖는 듯이 아이들의 생각과 삶 속에 약간의 변화만이라도 일어난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하며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뿐입니다.
“모든 폭력은 침묵을 먹고 자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 동아리, 아르바이트 생활 등 다양한 종류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문제 상황에 노출되는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갈 수 있으려면 침묵하지 않아야 합니다. 1년 차 신규교사도, 특성화고 현장 실습생도, 이 사회에 초년생으로 내 던져지는 모든 존재들이 말로, 글로 표현하는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침묵하지 않고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에 이 책이 출발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