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연재]제대로 화내기 프로젝트 제1화
- 수업설계부터 모둠세우기까지
박준일(온양여자고등학교 국어교사)
*속도와 꾸준함이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쓴 수업일기입니다.
앞으로 시간 여유가 생길 때마다 수업 장면을 기록하고 연재하겠습니다.
1. 수업의도-애들아, 가끔 화가 날 때 있지?
3학년 2학기는 수업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시기 수업을 하시는 선생님들 대부분은 1~2시간 만에 끝낼 수 있는 수행평가를 2개 정도 하고, 지필평가를 위한 강의식 수업을 4~5시간 정도 하신다고 했다. 고3 아이들에게 2학기 성적은 대입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9월 중순에 있는 수시 원서 접수 기간이 지나면, 아이들은 면접을 보느라 교실에 있을 수 없다.
일반계고 3학년을 처음 가르치는 나는 오기가 생겼다. 3학년 2학기 수업을 불가하게 하는 대입제도가 마음에 안들었고, 수시 원서를 쓰기 직전까지의 한달이 안되는 기간 동안이라도 아이들과 의미있는 배움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방학 동안 엄청난 내공을 가진 전국구 국어 선생님들의 블로그, 유튜브, 책을 찾아봤다.
그러다 천천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신 김영희 선생님의 블로그를 만났다. 김영희 선생님은 작년에 중등 1정 연수 강사로 오셨었다.(줌으로 만나 영희샘은 나를 모르시겠지만!) 영희샘은 꾸준히 수업 아이디어, 수업 활동지, 수업 과정, 수업 성찰을 블로그에 올리신다. 이 글들을 보다보면 영희샘의 깊은 통찰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에 '아! 나도 이런 수업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든 영희샘의 수업은 '사회과학 도서 읽고 비평문 쓰기'다. 감사하게도 블로그에 전국모에서 하셨던 강의의 원고를 올려주셨는데, 그 안에 이런 말이 있었다.
"파르르 화만 내고 끝나는 건 현상 개선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잠시 후련해질 순 있겠으나 부조리는 반복될 것이므로 나는 계속 화낼 수밖에 없다. 아무리 화를 내도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이 무기력해진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화를 일으키는 사안의 이유를 찾고 그것을 없애는 방책을 탐색하는 일이다. 그래서 글을 제대로 쓰는 능력을 갖는 일이 필요하다. 사고를 글로 옮기면 원인 분석, 대안 모색이 훨씬 쉬워지기 때문이다."
영희 샘의 이 말이 나에게 울림이 줬던 이유는 내가 이 글을 읽을 당시에 '파르르 화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 휴가로 부산 광안리에 다녀왔는데 그때 해변에서 폭죽을 터뜨리고, 음료를 먹은 후에 쓰레기를 그 자리에 그냥 놓고 가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나라 대입제도에는 문제가 많아도 너무 많다. 안산 선수의 메달을 빼앗아야 한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도저히 이해가 안됐다. 세상에 이런저런 불만이 쌓이고 쌓여 있었는데, 영희 샘의 글을 읽고, 한 가지 경험이 떠올랐다. 학생 중심 수업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많아 '이건 문제가 있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나무학교 숲소리의 글로 써냈던 경험. 혼자서 끙끙 앓고 있던 문제 의식을 글로 표현하고 남들에게 보여주니 속이 후련하더라.
그래서 고3 아이들과 심화국어 시간에 '제대로 화내기 프로젝트'를 하기로 했다. 이 프로젝트의 뼈대가 된 교사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우리 삶 속에서 만나는 사회 문제에 대해 '분노'의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이 분노의 감정은 '이건 아닌데, 문제가 있는데'라는 생각에서 오는 것이고, 문제의 발견은 문제 해결을 통한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시발점이 된다. 그런데, 분노의 감정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문제가 일어난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것이 왜 중요한 문제인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깊이 사고하지 않고 단순히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화를 내면 잠깐은 속이 시원할지 몰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외국인 노동자 혐오, 여성 혐오, 남성 혐오 현상처럼 누군가를 혐오하게 되거나, 이기적 냉소주의자가 된다. 이는 생산적인 분노가 아니다.
사회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나의 문제'로 인식하고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의 관점과 생각을 발견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7차시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학생들과 위와 같은 사고 과정이 일어날 수 있는 경험을 하고 싶다.
2. 백워드로 수업 설계하기
이렇게 하고 싶은 수업이 생기자 그 뒷일은 술술 진행됐다. 우선 심화국어의 성취기준 문서를 열어봤다. 심화국어 교과는 기본적으로 학문 활동을 위해 정보를 수집, 분석, 조직하고 말과 글로 표현하고, 토의 토론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과다. 내가 구상한 프로젝트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책을 읽고, 모둠원과 토의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평문을 쓰는 활동들이니, 심화국어의 취지와 딱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성취기준을 재구성하고 내가 심화국어 시간에 꼭 가르쳐야 할 핵심지식과 기능을 추출해봤다.
국어과 성취기준에서 핵심지식과 기능을 추출하지 않으면, 자칫 이 수업이 국어 수업인지, 사회 수업인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다양한 교과를 융합하는 것은 좋으나 국어 시간에 가르쳐야 할 것은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어 과목에서 학생들은 언어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타인과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좋은 예시가 많으면 수업할 때에도 좋다. 교사가 앞에서 "좋은 책 대화의 특징은 이래.", "좋은 비평문은 이렇게 쓰는 거야."라고 백 번 말하는 것보다 좋은 예시 한 두개를 함께 읽고, 그 특징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아무튼 이렇게 평가 요소 초안을 잡았다.
다음에 할 일은 학생들이 이 수행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좋은 활동들을 설계하는 것이다. PBL의 일반적인 흐름에 따라 활동의 큰 얼개를 짰다. 7차시 안에 두 가지 수행평가를 모두 하면서, 학생들이 의미있는 배움의 경험을 할 수 있는 수업을 구상하는 게 쉽지 않았다. 난 지금까지 프로젝트 수업을 하면 거의 한 학기의 반 이상을 할애했다.
그리고 수업 설계의 큰 틀은 모두 나무학교 PBL센터 선생님들과 함께 구상했다. 노트북 앞에 앉기도 어려운 여름방학에 이렇게 꼼꼼히 수업 설계를 할 수 있었던 건 함께 수업을 고민해주신 PBL센터 선생님들 덕분이다. PBL센터의 활동이 궁금하시다면 링크를 클릭!
3. 학교 선생님들과 협의하기
수업의 큰 얼개를 짰으니, 함께 3학년 심화국어를 가르칠 선생님들의 생각을 여쭈어야 했다. 함께 수업하시는 국어 선생님들은 비슷한 나잇대의 열정 가득한 선생님들이어서 꼭 내 수업 아이디어가 선택되지 않더라도 좋은 수업 협의가 될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침을 꼴깍 삼키며 선생님들께 카톡을 보냈다.
1차적으로 카톡으로 수업에 대해 함께 생각을 나눴다. 프로젝트 주제와 활동의 큰 틀에 대해서는 흔쾌히 동의를 해주셨고, 구체적인 수업 상황에서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부분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셋은 2차로 학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아놓고 카톡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활동지를 포함한 수업 자료를 만들어 카톡에 올리면 선생님들은 꼼꼼하게 살펴 피드백을 주셨다.
2차 회의에서는 수행평가 채점기준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성취기준과 평가 요소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 교사가 관찰을 통해 명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지, 아이들이 읽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인지를 중점적으로 점검했다. 이렇게 나눈 대화 내용을 종합하여 수행평가 채점기준표를 완성했다.
이날 학생들이 읽을 텍스트 자료를 어떻게 나눠줄지도 중요한 논의 사항이었다. 아이들이 A4 20쪽 내외의 글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질문이나 생각을 메모도 하고, 포스트잇도 붙이는 경험을 했으면 했다. 모두에게 책 한 권씩 사줄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럴 만한 예산은 없어서 학생들이 읽을 부분만 모아 인쇄소 제본을 맡기기로 했다. 그래도 150만원 정도의 예산을 썼다. 아래 사진은 그 자료의 표지와 차례 페이지다.
4. 제대로 화내기 프로젝트 과정 - 1차시
1차시 활동지 - 익명의 사회 비평가가 보내 편지
프로젝트 도입 활동에서 교사는 학생들이 프로젝트에 몰입할 수 있도록 '이 프로젝트를 왜 하는가'를 자연스럽게 설득해야 한다. 이 과정이 정말 어려운데, 전문가의 가상 편지를 통해 구체적인 프로젝트 맥락을 설정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저는 이 분야의 전문가인데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어서 훌륭한 여러분들에게 이러저러한 도움을 요청합니다. 꼭 도와주세요.'하는 식이다.
이 편지 안에는 학생들에게 프로젝트의 이정표가 되어 줄 탐구질문도 스리슬쩍 넣는다. 이번 프로젝트의 탐구 질문은 '이건 문제야'라고 느끼는 일에 대해 제대로 화를 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이다.
도입 활동의 가상 편지는 최대한 짧고 간략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다. 첫 시간부터 텍스트로 꽉 찬 활동지를 보면 아이들은 활동지를 보자마자 마음을 닫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편지를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한참 고민했다. 글을 줄여보려 해도 다 아이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인 것 같았다. 그래서 영상을 글과 함께 보여주면 아이들이 마음을 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전문가의 영상 편지를 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었다. 내가 사회 비평가와 알고 지내고 있을리가... 하지만 언제나 해결책은 있다. 요즘 메타버스가 참 유행인데,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캐릭터가 이 편지를 읽으면 된다. 실제 사회비평가와 아이들이 만나면 더 좋았겠지만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아이폰은 미모티콘이라는 기능을 활용해서 가상 인물을 만든 후에 동영상을 찍으면, 가상의 캐릭터가 말을 하는 영상을 만들 수 있다. 삼성 핸드폰도 비슷한 기능이 있는데, AR 이모지 카메라라는 기본 어플을 사용하면 된다. 구체적인 방법은 아래에!
이제 얼굴은 됐고, 아이들이 모르는 목소리를 빌려야 한다. 처음엔 네이버 클로바 AI를 활용할까 했으나 여전히 말투가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용기를 내 아내에게 영상 촬영을 부탁했다. 아래는 완성 영상!
1차시 활동지 - 모둠 세우기
영상 편지를 통해 아이들이 '이거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면, 이제 모둠을 구성해야 한다. 평소에 '앉은 자리에서 모둠 만들기', '같은 맛 사탕을 뽑은 사람끼리 모둠 만들기', '아이들이 역할 지원서를 내고 이걸 바탕으로 교사가 모둠 만들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모둠을 구성하는데, 이번에 활용했던 모둠 구성법은 다양한 능력을 가진 학생들이 골고루 한 모둠에 모이게 하면서, 2~30분만 쓰면 되는 아주 만족스러운 방법이다.
방법은 다음과 같다.
<모둠 구성 방법>
*모둠원 역할: 사회자(1명), 기술자(1명), 기록자(2명)
*모둠 구성 방법
1. 책상을 모둠 형태로 만들고, 자리에 모둠 번호를 붙인다.(1모둠, 2모둠, 3모둠 ...)
2. 사회자를 하고 싶은 학생을 자원받는다. 사회자는 모둠원 1명(기술자)를 뽑을 수 있기 때문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충분히 생긴다.
3. 사회자가 기술자 1명을 뽑는다.
4. 사회자와 기술자 짝은 복도로 나간다.
5. 나머지 친구들이 교실 뒤로 나갔다가 자유롭게 각 모둠에 2명씩 앉는다.
6. 교사가 복도에 나가 모둠 번호표를 나눠준다.
7. 사회자 기술자 짝은 자신들이 뽑은 모둠으로 가서 앉는다.
8. 함께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기타 사항
1. 모둠이 완성되는 순간에 친구를 배려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도록 사전에 안내한다.
2. 이 모든 절차는 시작 전에 학생들에게 미리 안내하고 동의를 받는다. 절차적 정의를 확보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사회자의 역할은 책대화 시 모둠 질문을 중심으로 대화를 진행하고, 모든 모둠원들이 공평하게 발언할 수 있도록 시간을 조정하는 것이다. 기술자는 네이버 클로바 노트 어플을 활용해 책대화를 녹음하고, 기록자들이 기록한 결과를 참고하여 대화문을 편집한다.(네이버 클로바 노트 어플에는 클로바 AI가 사람들의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해주는 기능이 있다. 정확도는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80~90%?) 기록자는 책대화 중에 친구들의 발언을 활동지에 수기로 기록한다.
이 모둠 구성 방법이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모둠 안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사회자를 자원 받았기 때문이다. 사회자는 자신이 함께 하고자 하는 모둠원 1인을 지목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자를 할지말지 우물쭈물 하는 학생도 주변에서 '야~ 해봐~'라고 부추기면 앞으로 나오게 된다. 또 이렇게 자원해서 나오거나 주변의 추천을 받은 친구들은 대부분 사회자의 역할을 책임감 있게 수행한다. 또 사회자가 뽑는 기술자도 보통은 자신과 친한 친구인 경우가 많은데, 사회자와 친한 친구 역시 책임감이 강할 가능성이 높고, 모둠 안에서 1명이라도 나와 가까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학생들은 안정감을 느낀다. 또 기록자들도 자리에 앉을 때 보통은 자신과 친한 1인과 함께 앉는 경우가 많다. 이 역시 기록자 친구들에게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제비뽑기를 통해 사회자-기술자 짝과 기록자 짝이 만나게 하면 동시에 건강한 긴장감이 조성될 수 있다.
이후의 수업 이야기는 다음 글에 쓰겠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어요
오늘 글에서 소개한 수업 셀계표, 평가계획, 1차시 활동지 파일도 함께 공유합니다.
제대로 화내기 프로젝트 제2화 읽기